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기억은 왜 불편해야 하는지 침묵하지 않는 증언의 윤리는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해 본다.
1. 증언은 고발이 아니라 책임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흔히 떠올리는 ‘홀로코스트 체험기’와는 결이 다르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겪은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감정의 분출이나 비극의 재현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을 해부하듯 분석한다. 누가 살아남았고, 누가 침묵 속에 사라졌는가를 ‘운’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윤리적 질문을 낳는다고 말한다. 구조된 자는 말할 수 있었고, 가라앉은 자는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은 그 침묵의 간극을 성찰의 언어로 메우려는 시도였다. 레비에게 증언은 과거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증언은 현재를 시험하는 책임이다. 그는 “기억은 왜곡되기 쉽고, 인간은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재편한다”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증언은 더더욱 차갑고 정확해야 한다. 이 책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 절제야말로 독자에게 많은 생각과 양심의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2. 회색지대라는 불편한 진실
이 책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회색지대다. 레비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이분하는 서술을 경계한다. 수용소 내부에는 권력을 조금 더 가진 죄수, 동족을 관리하던 유대인, 생존을 위해 타인을 밀어내야 했던 약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가해자도, 순수한 피해자도 아니다. 레비는 이 회색지대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불편해진다. 우리는 보통 명확한 악을 원한다. 그러나 레비는 악이 일상 속에서, 제도 속에서, ‘어쩔 수 없음’이라는 언어 속에서 자란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위험은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함이다. 이 분석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사회와 제도를 떠올리게 된다.
3.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증언의 윤리
프리모 레비는 스스로를 ‘구조된 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구조됨은 결코 축복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평생의 질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왜 나는 살아남았는가. 더 선했기 때문인가, 더 강했기 때문인가. 그는 그 어떤 이유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남은 자는 말해야 할 의무를 떠안게 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점은, 레비가 독자에게 감정 이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연민을 구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의 사고를 요구한다. 증언은 감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선택을 바꾸기 위한 지적 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내내 차분하지만, 읽고 난 뒤 오래 흔들린다.
4. 가해자는 누구였는가,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레비는 독일인 전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개인의 책임을 제도 뒤에 숨기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이 어떻게 인간을 무력화시키는지 분석한다. 특히 기억의 왜곡, 책임의 전가, 피해자-가해자 관계의 희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교묘해진다고 지적한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윤리 교과서에 가까워진다.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리되지 않을수록 사회를 잠식한다. 레비가 말하는 진정한 화해는 망각이 아니라 인식에서 시작된다. 불편한 기억을 견디는 힘이 공동체의 성숙도를 결정한다는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5. 의대 수시·생기부 관점에서 이 책의 의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의대 수시 생기부 독서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생명윤리, 인간 존엄, 책임 윤리, 집단 속 개인의 선택이라는 주제를 모두 포괄한다. 특히 의학이 다루는 ‘생존’과 ‘선별’의 문제를 인간학적으로 확장시킨다. 환자를 수치나 확률로만 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감수성, 그리고 제도 속에서 전문가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회색지대·책임·기억의 윤리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사유를 정리한다면 전공적합성과 인문적 성찰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다. 의사가 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만이 아니라, 판단의 무게를 감당하는 태도임을 이 책은 조용히 가르친다. 또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비극을 재현하는 책이 아니라, 기억을 관리하는 법을 묻는 책이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통해 과거를 고정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를 흔든다. 이 책은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사실을 직시하려는 태도 자체가 윤리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도 읽혀야 하며, 특히 생명과 책임을 다루는 진로를 준비하는 학생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